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눈물의 여왕 10화, 너에 대한 나와의 선약

by 류지 Ryuzi 2024. 4. 8.



이 여자가 걱정을 한다.

지금 분명, 내 걱정을 하는 게…

착각이… 아니다.










핸드폰이 꺼져 버렸다.


다들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,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왔다.

-드르륵.

문이 열리고 내 앞에 우뚝 선 사람.

해인이다.


아직… 안 자고 있었구나.





설마,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?


생각지 못했던 상황에, 나도 모르게 물음표가 튀어나오려 했다.
하지만, 그 보다 내 얼굴을 바라보는 해인의 눈이 점점 커지며 기함하는 게 먼저였다.




“어떻게 된 거야? 퇴근한 게 언제인데 이 시간에 들어오면서…
얼굴은 또 왜 그 모양이냐고!”

나는 그대로 해인의 손에 잡혀 들어갔다.



“…맞았어?”

덥석.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부여잡았다.
순간 옴짝달싹 못하고 혀가 굳는다. 해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, 머리가 휘둘린다. 해인의 시선이 머리끝부터 샅샅이 훑어 지나갔다.
난 지금 해인이의 손아귀에… 아, 정신을 차려야 한다.


“맞은 건 아니고…”

겨우 내뱉은 말이 이건가. 맞긴 맞았지만 맞은 건 아니라고?
그래. 제대로 된 펀치를 위해서 조금 맞긴 맞았지만, 이건 맞은 거라 할 축에 속하지 않는다.

대충 이런 뜻으로 해석해 주길 바라는 내 마음은 해인의 매서운 눈빛에 입안으로 그대로 꿀꺽, 삼켜졌다.




이 상황을 뭐라고 말해서 모면해야 하는가, 두뇌 회로가 풀가동 중이지만, 아무 소용이 없었다.
잔뜩 화가 난 해인이의 눈빛에, 입매에 시선이 고정되어 버린다.

뭐라고 해야 하지?

내 얼굴이 이 모양이 되어 버린 게,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어떻게 설명해야… 해인이가 화를 내지 않게 되는 거지?

해인이네 집을, 회사를 되찾기 위해서 일단은 토지매매 사건부터 해결해야 하는 이 전반적인 상황과, 그 실타래를 조금이나마 풀고 왔다는 승전보를 알리는 게 먼저일까
아님, 내가 복싱을 해서 맷집도 세고, 나보다 걔네가 훨씬 더 많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먼저일까



넥타이가 순식간에 풀어졌다.
셔츠 단추가 하나 둘 풀어졌고, 뇌 회로가 자꾸만 안 돼, 안 돼를 외쳤다.

빠른 속도로 내 몸상태를 체크해 나가는 해인이를 바라보며 정신줄을 자꾸 놓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…

“해인아, 내가 얘기를 할게-”


“내가 얘기할게-
자, 잠깐만, 해인아, 얘기를…”



“ㅡ쓰읍!! 가만있어!!!”


“……”

참나.

내가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가 없다.
나는 해인이 앞에서는 왜 뭘 잘 못하는 걸까.

공부도 누구보다 잘했고, 복싱도 잘해서 사기꾼들도 제압해서 경찰서 넘기고 왔고…
회사일도 잘하고, 그 무엇 하나 어려울 게 없이 뚝딱뚝딱 해 내는데.

나는 해인이의 짧은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곧잘 일시정지가 되곤 한다.

결국, 등에 있는 피멍까지 죄다 들켜버렸다.


“여기 왜 빨개?


“뭉둥이 같은 걸로 얻어맞은 거야?“


아… 젠장…

내가 해인이한테 숨길 수 있는 게 있을 리가.

그건 그렇고, 저 눈빛은 분노 게이지가 언리미티드, 예상 범주를 훨씬 벗어난 것 같군.

비, 비상이다.



“내, 내가…”


“설명을… 해 줄게…”


“내가 일방적으로 맞은 게 아니고, 혀 안 깨물었고, 안 얻어맞았고.
이거 봐. 아무, 아무렇지도 않잖아.
그냥 얼굴만 좀 긁힌 거야. 입가만 좀 터지고. “



“그건 왜 터지냐고, 왜!“

해인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있다.




뭐랄까.

야단을 맞고 있지만, 야단만은 아닌 것 같은 이 느낌.

그래서 뭔가… 긴장은 되지만 마음이 편안한 느낌.

쓰라린데 간지럽고 말캉한 느낌.



분명하다.


이 여자가.. 내 걱정을 하고 있다.



“이 와중에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3대 1이었어.”



“심지어 상대는 무슨, 삼단 봉, 이런 무기들을 구비하고 막 달려들었거든?”


“몰랐겠지만, 내가 어렸을 때, 복싱을 좀 했거든.
그 때 이, 맷집이라는 것이 생겨서 아, 이 정도는 아프지가 않고”


“아, 뭐야!! 아!!!”


“아….!!!!!!!”


”아, 이건 따가워 가지고…“


그래.

난 해인이를 안심시키고 싶었어.

어떤 상황이었는지, 나란 사람이 이렇게 가진 능력이 좀 있어서. 이 정도쯤이야 걱정할 정도의 축에도 못 낀다는 것을 설명해서
잔뜩 날카로워진 마음과 눈빛을 좀 어루만지고 싶었던 거야.

면봉에 묻힌 약을 내 입술의 상처에 바르는 손길은 부드러웠던 것을 알아서
목소리와 눈빛은 그저, 걱정하지 않는 척하기 위한 연기일 뿐인 것을 내가 알아서

그래서 나도 그 마음을 안심시키고 싶었거든.

그래서… 그래서 그랬어.

내가 해인이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,
수세에 밀린 듯 했지만, 내 능력을 발휘해서 히어로처럼 모든 걸 어떻게 해결했는지.



“…그렇지만 내가 이겼다.”

“하나도 안 멋있어.”


당황스럽다.

해인이의 날 선 눈빛이 자꾸만 예전에, 아주 예전 그때의 눈빛 같아서.



“앞으로 이런 상황 생기면, 도망가는 거야.“


“약속해.”


“……”


“……대답 안 해?”


“입 다물라며.”


“미안한데, 그 약속은 못 해.
서, 선약이 있어서.”


“너에 대한 건데”


“암튼, 나 자신과의 선약.“


“나에 대한 거,
혼자 맘대로 약속하지 마.”


“그런 건 결혼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고, 우린
그런 거 안 하려고 이혼한 거야.”



그래. 해인아.

나 자꾸만 잊는다.




자꾸만 잊어, 내가..

우리가 이혼했다는 사실을.



너는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,


나는 왜


자꾸만 이렇게 잊는 걸까.



나 분명.

얼마 전만 해도 너랑 이혼하겠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에 말하고 다니던 놈이었는데.
너와 곧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뻐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감추지 못하던 놈이었는데.


나, 이상해.

우리가 이혼했다는 걸 정말 잊고 있기도 해.

조금 전처럼 네가 거칠게 말하면서도, 사실은 행여 정말 크게 다친 거 없나 걱정스러운 손길로 날 봐주는 동안에
아플까 봐서 살살 어루만지듯 연고를 발라주는 동안에

정말로 잊고 있었어.




해인아, 있잖아.

지금 우리 집에 와 있는 동안만이라도 모른 척해도 될까.

사실 난 이렇게 너랑 같이 있는 거, 많이 좋거든.

예전에 느꼈던 괴리감도 없고
아무리 사납게 굴어도, 아닌 게 보이고
아무리 날카롭게 말해도, 아닌 게 들리거든.




난 너 지켜줄 거야.

땡빚을 지고 와도 괜찮다고 했잖아.

땡빚이 아니라,
더 어려운 게 있어도 괜찮다고 말했잖아.

내가 같이 있을 거라고…

약속한다고.





그거 지금 다시 하는 거야.











10화 하이라이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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