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소설

세상에서 가장 멋진 꽃사슴

by 류지 Ryuzi 2025. 3. 27.



“이름이 뭐야? “

고개를 들었다. 1초 전까지만 해도 코끝과 입술에 한가득 향기로웠던 커피 향이 순식간에 존재감을 잃고 날아가 버렸다. 불청객이 맞은편에 앉아서 무려 턱받침을 하고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.

여기, 미친놈들도 오는 곳이었나.

침착하려고 애를 썼다. 원래 사람을 주시하는 걸 선택적으로 하는 습관이 있어서, 정말 눈여겨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초점 없이 실루엣만 보곤 했다. 갑자기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잘 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. 그래서 얼른 몸을 뒤로 젖혀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며 주변을 돌아다보았다.
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. 그게 아니면 그냥 혼자 무언가를 할 뿐, 눈에 띄는 방해꾼은 없어 보였다. 날 바라보는 시선이 좀처럼 거둬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, 한숨을 내쉬었다. 무시하고 일어날까, 아님 일단 얼굴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관찰을 좀 해야 할까. 저 사람은 내 얼굴을 아는데, 나는 모르는 채로 일어나 버리면, 나중에 다시 마주쳤을 때 내가 손해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번져갔다.

”이름을 알아야, 다음에 만나면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.”

턱이 보였다. 은근히 각도 맞춰서 꽃받침을 한 모양새가 눈에 거슬렸다. 새끼손가락은 길었고, 남자치고 피부가 부드럽고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.
신천지인가. 마약판매자인가. 아님 뭔가 내게 팔아넘겨야 할 무언가가 있는 건가. 요즘 세상에 이름 묻는다고 대뜸 알려줄, 그런 보통인간이 어디에 있다고 저러는 걸까.

“너 맨날 얼그레이바닐라티라테 따뜻한 거 마시지?”

최애의 오더명이 들리자마자, 맞은편 불청객의 얼굴 실루엣이 드디어 눈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. 뭐야. 내가 그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는 거야. 턱에서 시작한 내 시선은 그 남자의 코와 뺨과 눈매와 눈동자, 눈썹과 이마라인에 머리카락까지 거침없이 훑어 올라갔다.

“이만한 개인컵. 문을 밀고 네가 들어오면 항상 에너지가 넘쳤어. 눈 동그랗게 뜨고, 눈썹 올라가 있고, 약간 불도저 같은 느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지.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직진해서 왔어. 그리고 말해줬지. 네 닉네임을. 그래서 알아.”
“뭐야, 너. 여기 직원이야?”
“아니.”
“근데 그걸 어떻게 알아. 내 닉네임이 뭔데?”
“류지.”
“……”
“네가 매일 여길 오는 시간에, 나도 매일 이 자리에 앉아 있었거든. 몇 번 듣다 보니 외워지더라고.
매번 비슷한 옷에, 비슷한 목소리 톤에, 같은 텀블러에, 질리지도 않는지 매번 같은 오더. 그래서 네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. ”
“난 내일은 안 올 거야. ”
“사실 그 생각도 했어. 내가 이렇게 물어보면 넌 도망갈 거라고. 난 매일 널 봤지만, 넌 날 오늘 처음 봤을 테니 무서울 거라고.
그래서 말을 걸지 않고 그냥 두면, 어쩌면 매일 볼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해 봤거든. 근데 좀 뭔가 아까운 거야. 이대로 그냥 있기가 좀. 별로였어. ”

난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다 별로인데.

불청객은 생각보다 수다쟁이였다. 손에 들고 온 머그컵에 찰랑거리는 커피를 그냥 둔 것이 족히 5분은 지나있을 거였다. 커피는 뜨거움과 식어버림의 그 찰나의 뜨끈함을 마셔야 행복한데. 그걸 이미 마셔서 아쉬운 게 없어서인지, 아님 커피보다는 나의 입을 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는지.

“이름을 알기 전에는 류지라고 부르면 돼? ”
“아니, 그냥 가주면 좋겠어. 지금 무척 방해가 되고 있거든. ”
“류지. 나 네 글 읽은 것 같아. 세상에 아주 많은 류지들이 있겠지만, 며칠 전에 읽은 글이 딱 너였어. ”
“난 글 안 써. ”
“아, 그래? 이상하다. ”

심술이 났던가. 뭔가 나에 대해 안다고 나불거리는 저 입술을 닫아버리고 싶었던 걸까. 나는 그 수많은 류지들 사이에서, 가끔 글을 쓰며 인생을 논하다가 즐기는 걸 좋아하는 류지였는데, 그 익명성이 들켜 버리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류지로 돌아앉았다. 쫓아내야 한다, 맞은 편의 화면을 꺼버리고 싶은데 전원버튼도 없는 보이는 라디오 같았다.

“내 이름은 안 궁금해? ”

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. 머리카락, 이마, 눈썹을 순서로 턱까지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. 이 커피 지점은 내가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도 없을 곳이었다고 생각했고, 그래서 누군가와 마주 보고 대화를 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, 누군가를 궁금해해야 할 일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.

“닉네임을 한쪽만 알고 있으면, 평등한 대화를 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, 내 것 알려줄게. ”
“이미 기울어진 대화라고 생각하진 않고? ”
“아마, 지금처럼 내 말에 대답해 주면 점점 수평에 가까워질 거야.”
“모르고 싶어. 이제 그만 가주면 좋겠는데.”

불청객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. 한숨을 내뱉으며, 앞머리를 넘기며 미간을 좁히고 이마에 주름이 몇 줄 잡히는 내 모습.

“섭섭해.”
“그럴 이유도, 필요도 없단 걸 알 텐데.”

눈에 거슬리게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, 그제야 풀어내고 바른 자세로 앉더니,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. 시간을 확인하는 걸까. 뭔가 너무나도 심심했는데, 시간은 때워야겠고, 오다가다 익숙해진 얼굴은 하나 있고, 마침 그 앞자리가 비어 있어서 합석을 요청했던 것인데, 여기 잠시 앉아도 될까요?라고 정중하게 물으려던 것이, 자기도 모르게 이름이 뭐야,라고 내뱉어진 것이라고. 그러니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대화였으며, 시간은 거의 다 되었고, 알람이 울리면 안녕을 고하고 잠시 합석했던 기억을 날려버려도 된다고. 이렇게 이 시간을 종료시켜 버리고 싶었다.

“세상에서 가장 멋진 꽃사슴님, 주문하신 디카페인 아이스 라테 나왔습니다.”
“내 닉네임이야. 세상에서 가장 멋진 꽃사슴.”

불청객, 아니 이젠 꽃사슴이 되어 버린 남자는 머그컵 안에 있던 커피를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. 커피를 저렇게 마시는 사람은 또 처음 봐서 꿀렁거리는 목젖을 한 세 번 보니, 머그잔이 다 비워졌다.

“꽃사슴이라고 불러주면 되겠다. 그렇지, 류지? ”
“커피 가지러 가야 하지 않겠어? ”
“잠시만. ”

꽃사슴은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내어 무언가 적었다. 연락처를 남기고 가려는 건가. 지금 내게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때, 내 앞 탁자 위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었다.

“내 닉네임이 한 번 더 불려지면 그때 일어날 생각이야. 그래야 류지가 내 닉네임을 외우지. ”
“이 연락처는 왜 주는 거야? ”
“필요할 것 같아서. ”
“세상에서 가장 멋진 꽃사슴님, 주문하신 디카페인 아이스 라테 나왔습니다!! ”
“가야겠다. 안녕, 류지.”
“이게 왜 필요하다는 거ㅇ…”

말이 끝나기도 전에, 꽃사슴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. 카운터에서 시원한 커피를 집어 들고 직원에게 고개를 작게 끄덕여 인사를 하더니,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.

내 맞은편 자리가 드디어 비었고, 누군가를 유심히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주어 시선을 맞추지 않아도 되었다.
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일은, 그대로 두면 될 일이었다.

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아이패드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고, 무언가를 쓰려고 했는데, 쓸 수가 없었다.
그건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다. 꽃사슴과는 아무런 상관없이, 글을 쓰다 보면 항상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가 있는데, 그냥 그런 거였다.
그래서 옆에 놓아둔 텀블러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. 얼그레이 향이 달디 단 바닐라티와 함께 뜨끈하게 들어왔다.

꿀꺽거리던 꽃사슴의 목이 생각나 버렸다.




20250327


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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